여립공 사건

鄭 汝 立 公 事 件 (己丑 獄史)
 
 

1 . 여립 공의 출생

여립 공은 명종 8년(1553) 첨정(정4품)벼슬을 지낸 희증 공의 아들로 명종 원년(1546)에 태여 낳으며 자는 인백 또는 대보이고 별호가 오산이다 전북 진안 죽도(현 진안읍 가막리)에 서당을 짓고 강론을 하여 죽도 선생이라고도 부른다. 동래정씨 19세손이고 대호군공(휘.인)의 9세손으로 선조 22년(1589)에 전북 진안 죽도에서 진안 현감 민인백 에게 살해되었다. 여립공은 명종 20년(1567) 전라감영에서 시행한 향시 소과에 합격 명종이 승하(1567)하고 하성 군이 선조 임금이 된 후 선조 원년에 진사가 되고 선조 3년(1570) 식년 을과에 급제 홍문관 수찬(정6품)에 올랐다 당시 유학의 거두 이율곡. 성혼과 친하게 지냈으며 이율곡과는 존형이라 호칭 상호 평교 하였다 여립 공은 한때 서인의 편으로 이조 전량 자리의 물망에 오르자 이이 등 서인들이 이를 막은 일이 있었고 동서 양당에서 유능 다재한 인물을 자기편으로 확대 여립 공도 양당에서 무척 탐을 내었다 이에 여립 공은 개인의 능력과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동인편이 되었다 이에 서인의 불신과 불만이 가득 하여 이 율곡 서거 후 율곡의 조카인 이 경진은 여립 공이 이 율곡 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성용을 거간이란 문구를 공개 선조의 불쾌한 꾸지람으로 여립공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여립 공은 활동적이고 지도력이 강한 성격으로 이황 선생의 예안 향약과 이율 곡의 해주 향약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태인 에 고현 향약을 만들어 이름을 대동계라 하였다.


2 . 여립 공의 거사 계획 은 사실인가 모함인가

여립 공이 당시 조정에 대항하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는지 아니면 전혀 그런 사실이 없거나 여립 공의 마음속에만 조정에나 현실에 대한 불만만 가지고 있었는지는 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래 사실들에 대하여 서인들의 음모에 의한 모함으로 본다.

. 천하는 공물이란 말을 자주 하였다.
. 선조 임금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 대동계를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시켰다.
. 거사를 숨기기 위하여 자살을 하였다.


위 사실은 당시 서인들이 주장 한 것으로 선조 수정 실록에 기재된 사실들이다 조선 실록은 임금 승하 후 조정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초는 사관이 처음 작성한 것을 토대로 춘추관 시정기와 기타 사료 중에서 중요한 사실을 뽑아 초초를 작성하고 이것을 다시 수정하여 중초로 하고 총재관과 도총관이 수정 또는 가필을 거친 후 정초로 정 해진다 그리고 초초와 중초는 세초연을 통해 그 흔적을 없애 버린다. 결국 누가 어떻게 기록하였다는 것이 영원히 밝혀지지 않기 위해서다 따라서 일단 편찬된 실록은 사료로서의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원년 7월에(1609) 시작하여 광해군 8년(1616)11월에 완성 총221권 116책으로 총재관 이하 220여명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측은 誣筆이 많아 수정을 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인조 21년(1643)사국 을 설치 그러나 수정작업을 주장하던 이식이 인조 25년(1647)6월에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하고 그 작업은 지지부진하였다 효종 8년(1657)9월에 세초연 을 열고 선조 수정 실록을 서인들의 주관 하에 42권으로 편찬하였는데 전반 30권은 이식이 후반 12권은 채유휴 등이 주로 편찬하였다.
결국 수정실록이 편찬된 이유는 첫째로 여립 공사건 때문이다 선조실록에는 여립 공사건은 단순한 일로써 정철의 모함에 의하여 무고한 인사들과 함께 희생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정실록은 여립 공 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의 내력을 모반과 관련하여 역적이라고 강조하고 사건 후 일을 수습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록 된 사실과 과정을 나열하였다 두 번째로 인물의 평가가 서로 다르다 선조실록에는 정철이 옥사를 다루면서 옥사 확대의 결정적 계기가 된 양천회의 상소 이 는 정철 등이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모조리 죽이기 위하여 양천회 를 사주하여 올린 것이라 하였고 정암수의 상소도 정철이 초 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수정 실록에는 서인들(이이.성혼.조헌.이귀.변사성.신금.유홍진.서태수.)의 상소문의 전문을 모두 실어 임란전의 기록은 이들의 상소문이 대부분 차지하였고 선조실록에 정암수 와 양천회의 상소 내용 전문이 실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정 실록에는 동인 측을 비난하는 주요 내용만 줄여서 다시 실었고 정인홍 을 비난하는 양홍수의 상소와 정언신 공을 비난하는 양형의 상소를 소상하게 실었으며 동인의 영수라고 할 수 있는 허엽에 대한 비난이 유독 많았으며 이발 김우옹 등의 비난도 많았다 또한 이이에 대한 기사가 많았으며 동. 서 간의 대립이 심했던 1582-1584년의 기록은 아주 적다 이와 같이 수정실록을 편찬하게 된 동기는 여립 공사건에 대한 처리 방식에 있다 선조실록에는 여립 공사건은 서인인 정철에 의해 무고한 인사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내용을 부각시키는 반면 수정 실록에는 당시 서인의 학자인 이이. 성혼. 정철. 조헌. 등의 상소문을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수정 실록은 서인들이 주도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3 . 여립공 사건의 역사적 의미

호남인들의 차별 대우 및 기피 현상의 강화 결국 호남인들의 저항 의식이 되 살아나는 계기를 마련 결과적으로 동학혁명으로 이어 졌다고 볼 수 있다 또 한국 정치사에 진보세력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 천도 실패는 진취사상과 보수사상 대립에서 보수사상이 승리함으로써 그 이후 정치사가 보수적 속박으로 퇴보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는 우리 역사상 일 천년 래 제일 대 사건이라 강조하였고 여립공 사건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진보사상과 보수 사상의 대립에서 진보 사상이 패배한 것으로 이로 인한 정주학 위주의 사상으로 단순하게 경직되고 보수화 되어 조선이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립공 사건은 조선 역사상 삼백년 내 제일 대 사건이라고 하였다.


4 . 여립 공의 정치사상

여립공은 모반의 책임자로 누명을 쓰고 관련자들과 함께 징계하는 옥사가 진행되면서 그의 유품이나 가솔들의 남긴 자료가 전 무하고 그와 교분을 가졌던 당대의 학자들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 그와 관련이 있는 서찰과 같은 자료를 모두 파기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아는데 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몇몇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이해 할 수가 있다.

1) 천하는 공물이 다라고 한 것은 대동사상의 핵심인 천하 위공과 같은 것이다 여립 공은 국가가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 가문 또는 특정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국가가 바로 모든 사람들의 소유라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공화정의 대표적인 인물인 cicero가 공화국은 인민의 소유이다 또 여씨 춘추의 천하는 한사람의 천하가 아니 오. 천하의 천하이라는 것과 같다.

2) 선현 여능 이는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 또는 공직자를 선발하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요.순. 우. 가 자리를 전수하였다 묵자는 현명 한자는 선출하였다 또는 여씨 춘추의 무릇 군주의 세움은 대중들에 의해 이루어 진다와 같은 사상이다 동양 정치사에는 소규모 단위의 모임에서부터 군왕에 이르기까지 추대라는 만장일치제를 시행 해 왔으나 여립 공은 지도자 선출은 민의에 의하여 이루어 저야 한다는 대동사상을 주장하였다.

3) 역성혁명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여립 공의 주장은 왕권 세습을 부정 덕을 잃은 군주는 필부로 돌아가게 하여도 되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은 유가에서도 당연하게 여기었고 여립 공은 보다 적극적으로 군주 세습제는 용납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립 공은 대동사상과 변혁 사상을 골간으로 민본과 평등을 기초로 하여 전제 왕권과 폭력정치에 대항하는 준거가 되는 이상적인 사상가이었다. 이는 실학사상의 대표자인 정약용 선생 (1762-1836)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기축옥사의 전개 과정에서 진보적인 사람들 특히 호남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치적인 파장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5 . 한국 정치사에 끼친 영향

1) 여립공 사건으로 인해 호남인에 대한 기피 현상이 한층 심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치참여의 가장 중요 수단인 과거 진출 등이 둔화되었다.

2) 여립공 사건 후 중앙정부에 대한 호남인들의 저항 의식이 강해졌다 호남인들의 과거 응시 거부 민란 소작 쟁의 등 신흥 종교의 발생 특히 갑오 농민 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다.

3) 여립공 사건은 한국 정치사상에 최초의 미동한 혁명적인 사상의 좌절이며 진보 세력이 몰락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4) 여립공 사건은 당쟁을 한층 격화시켜 당색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학문과 사상의 다양한 발전을 저해하였으며 상대방을 무조건 부정하는 정치 문화를 낳았다.
이에 임란과 병란으로 서세 동점의 세력이 몰려 왔으며 이에 조정은 무력하게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립공 사건으로 진보 세력이 대거 몰락함으로써 자주적인 역량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립공 사건은 한국 역사상 삼백년 내 제일 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최초의 공화 주의적 혁명가로 알려진 영국의 크롬웰보다 육십 년이나 앞섰으며 프랑스 혁명보다는 이 백년이나 앞섰던 것으로 그의 정치사상이 결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다 분명 하게 확인 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6 . 기축옥사와 송강 정철, 성혼 송익필

기축옥사는 정철, 송익필 등에 의해 직접 간접으로 주도된 사건이다 특히 정철은 동서 분당이 있기 전부터 불평불만이 많았고 평소 또한 사감이 많은 사람이다 서인들의 추앙을 받았지만 큰 화를 불러 오게 한 우두머리로 당쟁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간 기축옥사 의 장 본인이다 이에 대한 정철의 평을 살펴보면 선조 임금은 정철을 극렬히 배척하였다 신묘년(1591)에 정철에 대한 탄핵이 빗발치자 선조는 다른 죄는 고사하고 그가 음으로 호남 지방 유생을 움직여서 저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자는 일대에 이름난 사대부일지라도 모두 역적으로 몰아 기필코 죽이려고 하였다 그 간사한 꾀가 이루어지지 못 하고 저희들의 속셈이 모두 드러나서 사세가 극히 궁하게 되자 대간을 시켜서 군부를 협박하여 마침내 저희 뜻대로 하였으니 이 한 가지만 봐도 옛날 간신들 중에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마음씨가 참혹 하고 독기가 칼날보다 더하니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하였다 이에 선조 임금은 “정철의 간독한 것은 최고의 간웅인데 성혼이 정철의 심복이 되었으니 철의 마음은 혼의 마음으로써 둘이면서도 하나인 것이다 천지와 귀신이 밝게 굽어보고 있으니 머리털이 마르지 않은 아이들이라도 또한 알 것이다” 하며 “이것은 조정과 상하에 끼침이 만고에 씻지 못할 오점인 것이다 어찌 은하의 물을 시원스럽게 끌어대어 수욕을 씻을 수 있겠느냐 한갓 스스로 통탄 할 따름이다” 한편 서인들로부터 화를 당한 사람이나 동인 측의 정철에 대한 비난은 너무 극렬하여 서인 측에서 변명할 여유조차도 가질 수가 없는 정도였다.
라덕윤 은 상소를 통해 “정철이 사나 읍 고 간략한 성질로써 이에 화단을 얽어 만들 괘를 내어 온당치 않은 무리들을 모아 그 세력을 확장하고 몰래 함정을 베풀어 무고한 사람을 빠뜨리며 공법을 칭탁 하여 사사 원수를 갚아 평생에 눈 흘긴 조그만 혐의까지도 모두 보복하였던 것이다 밖으로는 경박한 무리들을 충동시켜 일도의 사론을 가장하여 천청을 현란하게 하고 안으로는 간사한 무리들을 사주하여 대간의 성세를 빌어 불측한 모함을 얽어 밤낮으로 끓임 없이 공격하여 반드시 죽을 땅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숙종 조 鄭武瑞 등의 상소에서는 정철이 몸소 방략 을 지시하고 혹은 초야에서 고변케 하되 손수 소장을 기초하여 혹 그럴듯한 흔적을 엿보아 위조하여 만들고 혹 맹랑한 일을 무고해서 일을 꾸미되 혹 늦어질까 겁나는 것은 밀계해서 두루 받아 드리도록 만들고 혹 빈틈이 있을까 겁나는 것은 유언비어를 만들어 부합시키니 그가 아뢰어 죄를 만드는 것이 비록 주흥 래 준신 등의 각박함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정철과 성혼은 합하여 한 몸이 되었으니 정철은 몸뚱이요 성혼은 그 머리이라는 식으로 후일 사림들에 의해 동인들을 희생시킨 주모로 탄핵을 받았으며 정철과 더불어 압록강 동쪽에 같이 태여 났음이 부끄럽다고 비난을 받았다.


7 . 정언신공(1527-1591)

자는 입부 이고 호는 나암 이다 명종 21년(1566)에 등과 하여 우 부 승지와 도 절제사 우찬성 함경도 순찰사로 이 순신 신립 김시민 이 억기 등을 막하에 두고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문관이면서도 무관들의 존경을 받았다 기축 옥사당시 우의정이었으나 양천회 양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서인들 중심의 양사 에서는 계속 처벌을 주장하여 선조 23년(1590)갑산에 유배되어 선조 24년(1591)10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참다못해 굶어서 세상을 떠난 율 을 이 항복이 문상하여“대저 사람은 본래 잠깐 우거 하는 것이니 오래고 빠른 것을 누가 논하랴 이 세상에 오는 것은 곧 돌아감을 뜻함이니 이 이치를 내 이미 밝게 아나 자네를 위하여 슬퍼하노니 내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 하여 입이 있으나 말 할 수 없고 눈물이 쏟아 저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네. 베개를 어루만지며 이 엿볼까 두려워서 소리를 삼켜 가며 가만히 운다. 어느 누가 잘 드는 칼날로 내 슬픈 마음을 도려내 주리” 이렇게 무고한 죽음을 원통해 하였다.


8 . 기축옥사

서인의 거두 정철이 우의정으로 위관이 되어 사건 관련자들을 조사함에 있어 죄 없는 사람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례가 많다 그 하나의 예로써 도사 조대중이 부안의 관기와 이별하며 흘린 눈물을 적을 위해 울었다고 와전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조사 김빙은 평소에 눈병을 알아 바람만 쏘이면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정여립 공을 처형 할 때 날씨가 추워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는데 이로 인해 국문을 받다 죽었으며 이 외에도 동인의 선비 1.000여명이나 참화를 당했다고 한다. 사건 발생 후 3년에 걸친 이 참화는 기축옥사 또는 기축사화라고 하며 최근에는 광주사태라고도 한다. 정철은 정여립 공사건을 안전 모반죄로 조작하기 위해서 정여립공과 관계된 일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구별 없이 참형을 가하였던 것입니다. 사건이 종결 된 후 선조 임금도 무지막지한 정철의 소행을 알고 결국 강제로 유배 시켰던 것이다 이제 41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여립공의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공화 사상을 재조명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KBS의 역사 바로 세우기 위한 2002년 5월25일 1시간의 방영 등 이제 지하에 계신 여립공 할아버님의 영혼도 고이 휴령하시기 바라면서 후손의 한사람으로써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 참 고

∙K.B.S. 제 1 방송국 (2002. 5. 25. 20시∼21시) 역사스페샬
∙기축옥사 재조명 (정여립 선생 사건)
∙역사적으로 재조명한 방송사 및 역사학자
∙K.B.S. 제 1 방송국 (2002. 5. 25. 20시∼21시) 역사스페샬

1 . 역 사 학 자 신채호. 김용덕(조선후기 역사)
2 . 역 사 학 자 이 이 화(이야기한국사 저자)
3 . 서울대규장각 신 병 주 박사
4 . 전 북 대 이 희 권 교수
5 . 한가림연구소 이 덕 일 박사(소장)
6 . 대 진 대 권 인 호 교수
7 . 건 국 대 신 복 룡 교수
8 . 영 산 대 정 우 락 교수

수 찬 : 조선시대 史書를 편찬 홍문관의 정6품 벼슬
홍문관 : 經書와 史書를 관리, 王의 자문기관
정 랑 : 조선시대 6조의 정5품 벼슬
서 인 : 심의겸을 중심으로 형성된당파 궁궐의서쪽 남산밑에거주
동 인 : 김효원을 중심으로 형성된당파 궁궐의동쪽 정동에거주
첨 정 : 부이사관 4품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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