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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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빛낸 인물
 

대호군 휘 인(絪)공

동래정씨 11세손 휘 인 공은 고려 말 인물로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그 자취를 밝힐 자료가 없어 묘비의 글을 옮겨 적는다.

대호군 도지휘사공의 묘비 글

 호남땅 김제 동쪽 십리에 있는 승방산 동쪽 벌은 고려조 대호군 도지휘사이신 정공의 산소가 계시는 곳이다. 공의 이름은 인이요 동래사람이다. 상서좌복야 목은 그의 선조이며 검교 태자 첨사이신 숭은 그의 증조부요 자첨부사 지형은 그의 조부요 예문관 응교이신 승보는 그의 부친이다. 공의 배위는 벽성조씨로 대호군 기의 따님이며 묘는 대호군과 쌍분으로 모셨도다. 세 아들을 두니 첫째 섬은 이조판서요 다음은 호요 셋째가 승이니 연덕궁녹사로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예조판서 흥사는 섬의 아들이요 예조판서 가종과 사헌주부 가안은 승의 아들이다. 대사성 곤은 흥사의 아들이요 이조판서 수홍은 가종의 아들이다. 호조판서로 추증된 득홍은 가안의 아들이요 병조판서 준과 병조판서로 추증된걸과 호조판서 강은 대호군의 현손 중 더욱 두드러진 자다. 그 아래는 다 적을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도다. 공은 시대가 아득하여 그 나고 돌아가신 날 이력을 뚜렷이 알 수 없다. 고려사에서 살펴볼 때 공민왕 5년 5월에 강릉 교주도 도지휘사가 되어 왜구를 두 번 물리치고, 여진의 반란을 크게 격파하였다. 아깝다 그렇게 빛나고 훌륭한 공적을 전하지 못함이여. 공의 후손들이 비석세우기를 꾀하니 그 일을 주로 맡은 이는 15세손 치언, 16세손 기욱, 18세손 인식이니라. 비석의 글을 부탁한 자는 18세손 인세라. 인세는 학문에 뜻이 있어 나와 더불어 사귄지 십여년이라 그 말씀이 간곡한지라, 마침내 명을 지어 말하기를 슬프다, 임의자취 아득하여 밝히기 어렵구나. 빛나는 공적이 창사에 일컬었으니 덕은 두텁고 은혜는 흘러서 자손은 끝없이 이어 말할 수 없이 크고 깊으니 이 또한 새길만 하도다.
여기 새겨 후손에게 전하노라.

숭정기원후 5년 을해 3월 하순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제주 경연관세자시강원 찬선
서연관 서하 임헌회 찬



대사성 복재선생의 행장

 옛날 세종임금 시절에 덕이 조정에 가득하고 크게 밝혀 호남일대에 문명을 떨치니 남쪽 땅에 선비가 모두 우러러 본받았도다. 복재선생은 언제나 말이 소박하여 꾸밈이 없는지라 선생을 마음으로 따르는 이는 모두 맑고 아담하니라. 하루는 선생의 후손인 민이 그 행적을 안고와 글을 청하니 글쓰는 재간이 무디나 사양치 못했다.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이름은 곤(坤)이요, 호는 복재(復齋)니 동래정씨의 후손이라. 그 선조의 목은 벼슬이 상서 좌복야에 이르렀고 그의 네 아들은 제, 점, 택, 항이라. 모두 고려조의 문과에 벼슬하여 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었다. 셋째인 택은 찬선대부로 고려조 5백년에 뛰어났고 그 아래로도 줄곧 빛나는 벼슬에 올랐다. 증조부의 이름은 인이요 대호군이며 조부는 섬이니 조선조의 이조판서요, 아버지 흥사는 예조판서로 부인은 전주이씨다. 선생의 모습이 빼어나고 밝으며 행실이 뛰어나 어릴 때부터 어른과 같았다. 유교에 뜻을 두고 목은선생의 문하에 배웠다. 이미 깊은 이치를 이어받았고 스스로 오묘한 길을 찾아 마침내 큰 선비가 되니 도덕과 문장이 일세에 두드러졌도다. 세종임금 시절에 그 맑은 기품이 드러나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지제교에 이르렀다.
 세종이 그 맑고 곧음을 기특히 여겨 복재(復齋)라는 호를 내렸다. 국상인 조준공과 왕의 명으로 고려사를 닦을 제 국상인 정인지와 서로 의논하여 편찬하였다. 정통연간에 벽골 시골집으로 물러나 연촌 최선생과 덕으로 사귀고 의리로써 글을 교환할 제 묻고 이야기한 이치가 분명하고 정밀한지라 한 두루마리의 시가 있으며 후배를 이끌고 도와서 성취시켰다. 선배의 비문이며 누각에서 읊은 글을 당시 여러 선생의 문집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묘는 백구면 사랑절에 있으며 부인은 광산노씨로 국상 숭의 딸이다.
 부인의 묘는 시아버지 예조판서공의 묘아래(김제시 흥사동 산87-7)에 있었으나 2009년에 복재공묘에 합장으로 모셨으며, 아들은 둘을 두어 맏이 태지는 직장이란 벼슬을 지냈고 둘째 이지는 진사를 지냈다.
 아아! 선생의 덕과 선생의 글로써 좋은 임금을 만나 일찍이 세상에 나섰다면 나라에서의 일가 후배를 위한 공이 반드시 많았을 것이다. 후배에 전할 만한 문자도 많았으련만 병란의 탓으로 집에 감추었던 글들이 거의 흩어졌고 본 것이 얕고 아는 것이 엷어 국사와 야사를 자세히 고찰할 수가 없었다. 군자의 분수를 논하는데 즈음하여 더하고 덜할 수는 없으나 후학의 사모하는 마음으로 어찌 슬픔을 머금지 않으리요. 길이 한탄하노라.

숭정 임자(1672)년

가선대부 평안도 관찰사겸 순찰사 병마수군 절제사
이 만 영 삼가 지음.


풍천 휘 수홍(守弘)공

 풍천 선생의 이름은 수홍이고 자(字)는 의백(毅伯)이다. 아버지 가종은 벼슬이 예조판서이며 목은 이색의 문인인데 목은이 지은 자설이 있다. 어머니 정부인 전주최씨는 문간공 최철의 따님이다. 공이 천품이 영특하여 생원시를 거쳐 1390년(공양왕2)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하여 안성군수가 되니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으며 금산 청풍 밀양부사와 나주목사를 거쳐 내직으로 들어와 권근(權近)·하륜(河崙)·성석린(成石璘) 등과 교유하였다.
 1408년(태종8) 사헌부집의 재직 중에 민무질(閔無疾)의 당여로 지목된 하륜을 탄핵하고 무단히 하륜의 집에 사헌부관리를 보내어 수직(守直)한 사건으로 나주에 유배되고, 1409년 외방종편(外方從便 :죄인을 일정한 곳에 유배하던 제도) 하였으나 이듬해 복직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 사간원우사간·좌사간, 예조참의,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은 붉은 단풍 같고 덕은 간단없는 냇물과 같다하여 세종께서 풍천이라는 별호를 하사하였으며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임기를 마친 뒤 홀연히 관직에서 물러나 전주 안덕원에 정착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임수대와 락지루를 짖고 산천의 아름다움을 즐기었는데 덕행과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난리를 수차 지나는 동안 사적이 남은 것이 없다.
김제의 승방서원과 전주의 학천사(鶴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우의정 정언신(彦信)

 자(字)는 입부, 호(號)는 난암(懶庵), 예조좌랑 진의 5남 3녀의 5남으로 태어나 1566년(명종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검열이 되어『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그 후 전라도 도사, 헌납, 장령 등을 지냈다. 우부승지에 이어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던 중 1583년 니탕개가 쳐들어오자 우찬성으로서 도순찰사를 겸하여 막하로 이순신(李舜臣), 신 립(申砬),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무관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했다.
 이어 함경도 관찰사로서 북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하였으며, 1589년(선조22년) 우의정이 되었는데 서인(西人) 정 철의 사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고변되자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는 위관에 임명되었으나 정 철의 사주(使嗾)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척 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직하고 이어서 우의정 직도 사퇴했다.
 그 후 정 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 일파로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중 배소에서 별세하여 묘소는 장단에 있고, 문경의 소양서원에 제향되었다.


정여립(鄭汝立)

 정여립(鄭汝立, 1546년 ~ 158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학자요 사상가이다. 자(字)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여립공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년)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하여 1583년 예조좌랑, 이듬해 홍문관수찬 등을 지냈으나 스승인 이이를 비판하고 동인에 가담하였으며, 박순ㆍ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여립공은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매월 15일이면 한 곳에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들 대동계에는 여러 무사, 공사, 천노들로 가입되어 있었으며, 이들에게 강론하여 개혁 사상과 애국심을 심어 주고, 혹은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의 무력도 연마시켰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에는 녹도에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은 서인인데 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여립공은 남언경을 도와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출병하여 녹도와 손죽도(損竹島)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전멸시켰다. 이후 왜구들이 정여립의 대동계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풍비박산 도망쳐 달아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당당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여립공과 대동계는 역모로 몰려 3년 동안 무려 천여 명이 죽게 되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는데, 아래의 이유로 모함설이 유력하다

첫째, 정여립 모반사건은 확실한 증거는 없었고 대부분 여립공이 죽은 뒤에 역모관련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일부사람의 자백만 있으며,

둘째, 그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안에 각종 수신(受信)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셋째, 역모를 꾀한 자가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여립공이 반란을 음모하고 거사하기로 결심하였다면, 그의 역모가 드러났음을 이미 알고 있는 마당에 과격한 성격으로 보아 일전(一戰)을 벌였다든가, 아니면 우선 주변을 정리하고 서둘러 도망갔을 것이다.

다섯째, 여립공이 모반을 할 계획이었으면 공개적으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대동계원을 데리고 왜구를 토벌하여 세력을 드러내, 나라에서 경계심을 갖도록 하였을까? 대동계를 조직하여 훈련을 시킨 것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실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섯째, 당시의 임금 선조는 임진왜란 때 왕자 광해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을 막으며 군수지원을 요청했으나 승전을 시기하여 도와주지 않은 선조가 역모소리를 들었으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일곱째, 1623년 이후 서인과 그 후신인 노론이 대한제국 멸망 시까지 집권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기회는 주어지지 못했다.


 이제 역모를 주장하던 왕조시대는 가고 여립공이 주장한 공화주의 시대가 왔으니 새로운 평가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세상은 재주 있는 사람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전주부윤이던 남언경은 “정공은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다른 사람이 가히 따르지 못할 바이다” 라고 하면서 그를 주자에 비유하였고,
이발은 정여립을 두고 “당대의 제일 인물” 이라 했으며,
율곡 이이 역시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 라 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인백 정여립공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두고 “동양의 위인” 이라 칭송하였고,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 라고 평가하였으며, 역사학자 이이화는 정여립공을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고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을 뜯어고치고자 \ 온몸으로 현실에 부딪힌 진보적 지식인이었고, 선진적 사상가였으며, 민중에 토대를 둔 개혁가였다.” 고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정여립은 당대의 인물이었으나 그가 가진 재주와 공화주의 사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었다.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발명한 정평구(鄭平九)

 정평구(1566년 3월 3일 ~ 1624년 9월)는 동래정씨 20세손이며, 대호군공파 풍천공종중 효손공의 후손으로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발명가이다. 실존한다면 세계 최초의 비행기인 비차(비거)를 발명했다.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출신 정계주의 아들로 본명은 정유연(鄭惟演)이다.
 무관 말단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 의해 진주병영 별군관(別軍官)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중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비거(飛車 수레거는 수레'차'라고도 읽기 때문에 비거도 비차라고도 불린다.)’라는 것을 만들어 포위된 진주성 안팎으로 날아다녔다고 전해진다. 설계도 같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문헌의 묘사를 토대로 건국대학교 항공우주학과에서 복원한 비거(비차)가 공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본에서 편찬된 《왜사기》(倭史記)에 의하면 "비거(비차)로 말미암아 왜군이 작전을 전개하는 데 큰 곤욕을 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비거(비차)는 2 km 높이에 뜨고, 한 번에 무려 30~50리를 날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정평구와 비차의 활약을 본 사람들은 선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공을 치하하려 했다. 그러나 선조와 대신들은 이 상소의 내용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늘을 나는 기구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정은 정평구의 비차를 헛소문으로 취급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비차에 대해서 공식적인 기록이 남지 못했다.
 정평구가 선조에게 올렸던 상소 가운데는 "이 위급한 국난을 맡겨 준다면 3개월 안에 평정시킬 것을 맹세한다"는 것이었다.
정평구의 묘는 김제시 부량면 신두리 명금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독립유공자 수당(修堂) 정종엽(鄭鍾燁)

 수당 정종엽 선생은 년차 관계로 우리들이 직접 스승으로 모신 바는 없지만 그분이 남기신 깊이 있는 가르침과 대쪽 같은 성품, 올곧은 행실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의 본관은 동래 호는 수당, 자는 택신입니다. 고종 을유년(1885년) 3월 13일 오시(낮 11시~13시)에 진안군 마령면 원평지 자택에서 아버지 성모공과 어머니 천안전씨 사이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려서부터 천성이 매우 영특하고 부모를 공경함이 지극했다고 합니다. 공부에는발군의 진척으로 약관에 학문을 성취하였다고 합니다. 부친의 병환에는 넉 달 동안 시탕을 하면서 옷도 벗지 않고 눈도 붙이지 않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슬퍼함과 주선함에 유감이 없이 하였는데 어머니의 상 때에도 똑같았다고 합니다. 장지가 다소 멀었으나 한 달이면 세 번씩 성묘하고 기일이 되면 서러워함이 마치 초상 때와 같았다고 합니다. 간재 전우선생에게 사사하여 성리학을 깨쳤고, 항일의사 곽종석과 의병장 기우만 등 제현과 교유하여 더욱 지식을 넓히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 걱정이 지극하여 사직이 무너지자 신하의 절의를 지켜 은둔의 삶을 살면서도 뜻있는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정재 이석용과 해산 전기홍 등이 의병을 일으키는데 힘써 도왔다고 합니다. 더불어 이석용의 종군기인 《창의일기》가 혹 일경에게 넘어갈까봐 자청해서 자택에 깊이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28세 때에는 정재 이석용과 항일우국결사조직인 임자동밀맹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정재가 일경에 붙잡히자 그는 일경을 피하여 수시로 개명하고 정처없이 옮겨 다니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굳게 절의와 도리를 지키니 가는 곳마다 명망을 듣고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마령면 계남리 선산 재각인 도장각에서 후진을 양성하시다가 경진년(1940년) 10월 2일 백운면 평장리 자택에서 향년 56세로 별세하셨습니다. 2003년 8월 15일. 우국충정과 항일운동 업적으로 보훈처에서 건국포장을 수상하였습니다. 진안군 마령면의 내산사(萊山祠)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 《수당유고》가 있다. 《수당유고》는 2권이며, 구성은 시(詩), 서(書), 설(說), 서(序), 기(記), 잠(箴), 문경(問警), 제문(祭文), 행장(行狀), 전(傳), 묘갈명(墓碣銘), 묘표(墓表), 녹(錄), 부록(附錄) 등으로 되어 있다.


독립운동가 화암 정현섭

 우리가 흔히 독립투사라고 하면 안중근, 윤봉창, 김구, 김좌진 등을 떠 올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만 않았지 당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독립투사가 항일운동가 화암 정현섭(1896, 9, 14. ~ 1981, 1, 21.) 이다.
\  3·1운동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해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정화암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1920년에는 미국 의회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활동을 계획했다. 이 때문에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1921년에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1924년부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회영, 신채호, 박열, 신성모 등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함께 활동했다. 1931년 원심창이 합류하자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파 및 전향자 등을 사살했다.
1936년에는 국내 호서은행에서 5만 7천원을 탈취하여 기관지 <남화통신>을 창간, 발행기금으로 활용하고 남화통신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 시켰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1940년부터는 상하이에서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중에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정탐해 미국 공군에 보고하는 정보활동을 벌였다. 또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된 조선인 학도병의 탈출 학도병을 임시정부로 보내는데 후원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정화암은 상하이 한인 인성학교 이사장, 상하이 교민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 후 귀국하여 1960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민주당후보 조한백에게 패배하였다.  그 후 19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에 추대되었고 5·16혁명으로 붙잡혀 6개월간 징역을 살고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해 삼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참여했다.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 1974년 통일당 상임고문에 추대됐고 1947년 민주화회복 국민 선언에 참여했다가 1981년 10월 21일 85세로 사망했다.
198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 나의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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